꼬닥꼬닥 서귀포 도보여행 안내서 <따라나서면 서귀포가 보인다>

인생이 당신에게 □을 준다면?

🍊‘웬 라이프 기브스 유 텐저린스’(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영어 제목이에요. ‘인생이 나에게 귤을 준다면’라는 의미고요. 미국 속담인 ‘웬 라이프 기브스 유 레몬즈🍋, 메이크 레모네이드🧃’(When Life Gives Lemons, Make Lemonade)를 변형해 만든 제목이라고 해요. ‘인생이 네게 레몬을 준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라는 뜻이에요.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말고, 이를 역전의 기회로 삼으라고 합니다. 드라마 주인공을 연기한 아이유도 인생이 떫은 귤을 던지더라도, 그걸로 귤청을 만들어 따뜻한 귤차를 만들어 먹자는 뜻을 제목에 담았다고 전했는데요.
귤농사 짓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저의 관점에서는, 영어 제목이 ‘제주 귤’의 특징을 잘 반영하지 못한 듯 보여요. 근래 제주에서 나는 귤은 시지 않고 대체로 달고요. 품종이 다양해져도 마찬가지예요. 상품외감귤, 일명 파치도 달아요. 새콤한 귤을 맛보았다는 건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었을 정도예요. 그리고 드라마 속 주인공은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데, 왜 인생에 귤(달콤한 것)을 준다는 거지(?)라고 의문이 들었어요.
물론 맛이 신 귤이 간혹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신 귤을 보고 덜 익었다고 표현하시는데요. 맛이 신 귤을 청으로 담지 않아도, 상온에 오래 두면 신맛은 사라지고, 단맛만 남습니다. 한동안 바깥 바람을 맞은 귤은 상품 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쭈글거리는 표면, 그리고 싱거운 단맛. 드라마 제목을 더 적확하게 번역하면, 귤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을 듯 합니다. 감귤을 오랫동안 봐 온 여러 전문가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빈칸을 어떤 말로 채웠을까요?

오래된 귤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레드향 명인 오창훈 님의 답은 — ‘마르메르’

🍊감귤 명인이 된 이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걸 나무 앞에서 직접 봐야 고개가 끄덕여져요.”

그는 기술센터와 연구소의 교육을 농사에 접목하며 주위의 추천으로 감귤 명인이 됐다. 종종 자신의 밭에서 교육생과 함께 현장 수업을 연다. 전정, 수세 조절, 열매 생육 과정을 직접 나무 앞에서 배우는 식이다. 그가 가장 애정하는 품종은 레드향. 키우기 까다롭지만, 제대로 관리하면 최고의 맛이 난다. 그는 지금도 풀을 베고 약은 최소로 쓰는 초생재배를 고수한다.

🍊“인생이 당신에게 마르메르를 준다면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제목을 소개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마르메르. 그가 말한 마르메르는 예전 제주에서 흔했던 귤 품종 중 하나다. 팔싹, 붕깡, 호랑이깡처럼 다양한 귤이 있던 시절, 마르메르는 ‘쓴맛’과 향이 독특해 요즘의 단맛 위주의 감귤과는 결이 달랐다. 화장품 원료로도 쓰이곤 했다. 지금은 거의 재배되지 않지만, 어린 시절 그 맛을 기억하며 다시 찾는 이들이 있다. 시장에선 외면 받았지만, 어떤 이의 기억 속에선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맛. 그에게 마르메르는 그런 존재다. 꼭 달지 않아도, 누구에게는 오래도록 떠오르는 귤.

쓴맛 나는 인생이 때로는 야속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야말로 누군가에겐 개성이 되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유가 된다. 어쩌면 마르메르처럼. 쓴맛이 남았기에, 누군가의 입에, 마음에 오래 남는 귤처럼. 그 쓴맛은, 언젠가 누군가가 귤을 기억하고, 농부를 기억하게 할 하나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오창훈 명인은 자신도 그런 농부이고 싶다고 말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시간이 흘러도 누군가에게 문득 생각나는 사람. 기억을 따라 다시 돌아오게 되는 농부.

발효는 과학이고, 기다림이다

감귤 양조 전문가 이용익 님 답은 — '시간'

🥃 과실주는 당도가 생명이다.

“귤은 산은 높고 당은 낮아요. 그냥 둬도 단맛이 올라온다고요? 술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과실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도’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포도는 20브릭스에 달하지만, 감귤은 평균 12브릭스 남짓. 그에 따르면 “감귤은 양조 원료로는 꽤 까다롭다.”

“그냥은 발효가 안 되니, 방법을 고심했죠.”

그는 서귀포 지역 감귤에서 채취한 토종 효모를 사용한다. 이 균주는 지역 감귤에 최적화돼 있어 발효 안정성이 뛰어나고, 향도 좋다. 상품외감귤도 향과 산미가 살아 있다면 원료로 삼는다. 상품외감귤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기록과 원칙’

이용익 공장장은 전직 대형 주류기업 연구소장 출신이다. 그는 술을 만들며 가장 중시하는 두 가지를 이렇게 말했다.

“품질. 그리고 신뢰.”

그걸 지키려면 원료 상태, 당도, 산도, 곰팡이 여부까지 전부 기록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겨도 추적할 수 있어야죠.”

그의 대표 제품 ‘신례 명주’는 2년 반 동안 오크통에서 숙성된다.

“균은 잠들지 않잖아요. 나도 안 잡니다.” 발효를 밤새 지키는 사람. 술은 절대 감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인생이 당신에게 시간을 준다면.”

‘인생이 당신에게 □을 준다면’이라는 질문에, 그는 조심스러운 웃음만 지었다.

귤을 발효시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 오크통 안에서 무르익는 시간을 생각하며, 이용익 님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떫은 귤이 단맛으로 익어가듯, 술이 되기까지 걸리는 기다림을 통과하듯. 드라마 제목의 직설적인 결과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가 지켜낸 것은 언제나 시간이었다. 그는 오늘도 그렇게, 술처럼 인생을 익히고 있다.